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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이어 술을 빚다, 국순당 54년

2024.04.25

ⓒ국순당


대를 이어 술을 빚다
국순당 54년

조금 지친 날이었어요. 저녁 차릴 기운도 없이 집 앞 가게에 들어섰는데, 전국 각지의 막걸리를 판매하는 곳이더라고요. 뭘 마실까, 느린마을막걸리와 호랑이 생막걸리 중 고민하다가 달달한 호랑이 생막걸리를 선택했습니다. 같이 마시던 동생이 묻더라고요. “이건 어디 막걸리야?” 어라, 그러게요?


글│전민지

이날 알게 된 게 있습니다. 전통주의 명가 국순당과 호랑이 생막걸리를 만드는 배혜정도가, 느린마을로 이름난 배상면주가가 가족이었다는 것을요. 국순당과 배혜정도가, 배상면주가의 관계를 알아보기에 앞서 차근차근 역사를 되짚어 볼게요.

ⓒ국순당

국내 전통주의 주역 국순당

우리나라 전통주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사실상 명맥이 끊어졌습니다. 세금을 높게 책정하고 제조 면허를 쉽게 내주지 않아 조선의 전통주는 집에서 만들어 가족끼리 마시는 가양주에 그치게 되었죠. 일제의 수탈과 전쟁으로 생산 설비가 망가지고 주원료인 쌀을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어요. 먹고 살기도 버거운데 귀한 쌀로 술을 담근다는 건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니까요. 근현대사 속에서 우리나라 전통주는 꽤 지난한 세월을 보내온 거죠.

ⓒ국순당

전통주의 싹을 다시 틔운 건 국순당입니다. 창립자는 우곡(又麯) 배상면 회장으로, 대학을 다니던 때부터 평생을 미생물과 누룩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1970년 국순당의 전신인 한국미생물공업연구소를 차리고, 이후 1983년 배한산업을 설립했어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맞아 전통주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고, 이에 배한산업(現 국순당)은 전통주 개발에 뛰어들었습니다. 1991년 고려시대 명주인 백하주의 제조법을 복원해 약주 백세주를 출시하고 1992년 사명을 국순당(麴醇堂)으로 변경했어요. 우리의 누룩으로 좋은 술을 빚는 집이라는 의미라고 해요. 술을 의인화한 고려시대 소설 국순전에서 따온 명칭이라는 말도 전해지지요.

ⓒ국순당

술에 진심인 국순당은 농촌진흥청과 함께 국내 최초로 양조용 쌀인 설갱미를 개발했어요. 백세주를 비롯한 국순당의 모든 제품은 설갱미로 만들어지고 있죠. 전통주에는 더 진심입니다. 백세주를 개발하며 소주와 맥주가 주를 이루던 주류 시장에 전통주 카테고리를 만들었고 2002년 배상면주류연구소를 설립한 데 이어 2008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전통주 복원에 힘을 쓰기 시작했어요.

고려시대의 최고급 탁주 이화주를 복원하기도 했는데, 막걸리보다 더 걸쭉하고 부드러운 단맛이 특징이에요. 그런데 맛을 아는 이가 없어 복원에 애를 먹었다고 해요. 이밖에 백세주마을을 통해 고려시대 명주 자주, 조선시대 선비들이 즐기던 송절주, 사시사철 빚고 마신다는 뜻의 사시통음주 등 천 년 전 우리 술을 선보이고 있어요.

ⓒ배상면주가

전통주의 맥을 잇는 삼 남매

우곡 배상면 회장은 슬하에 삼 남매를 두었습니다. 세 남매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나가고 있죠. 국순당은 장남 배중호 회장이 물려받았고, 배혜정 대표와 배영호 대표는 각각 배혜정도가와 배상면주가를 설립했습니다.

ⓒ배혜정도가

둘째 배혜정 대표가 운영하는 배혜정도가는 며칠 전 제가 마셨던 호랑이 생막걸리를 생산하고 있어요. 우곡생주호랑이 생막걸리, 부자(富者)가 대표 제품이에요. 우곡생주와 호랑이 생막걸리는 우곡 배상면 회장의 우곡주를 바탕으로, 첨가물을 일절 넣지 않은 생막걸리입니다.

배혜정도가는 막걸리의 고급화·세계화가 목표입니다. 2001년 선보인 부자(富者)가 대표적이죠. 경성 지방 일대의 상류층이 마셨던 합주를 현대화하고, 국내 최초로 유리병에 담아 고급스러움을 더했습니다. 부자는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프리미엄 막걸리를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세계 3대 품평회라 불리는 벨기에의 몽드 셀렉션(Monde-Selection)에서 은상을 받으며 막걸리의 위상을 높였죠.

ⓒ배상면주가

하루가 멀다 하고 동동주를 마시던 대학 시절에 ‘맛있다는데 비싸서 못 마시던’ 막걸리가 있었어요. 누가 마셨다고 자랑하면 부러워하기 일쑤였답니다. 주인공은 느린마을막걸리. 감미료가 없어 시중의 일반 막걸리보다 조금 더 비쌌거든요. 아스파탐을 첨가하지 않았음에도 은은하게 퍼지는 단맛이 참 매력적이었어요. 다음날 숙취가 없다는 풍문이 돌기도 했죠.

느린마을은 막걸리, 소주, 증류주, 약주 등 배상면주가에서 시리즈로 선보이는 주류예요. 배상면주가는 우곡 배상면 회장의 차남 배영호 대표가 부친의 이름을 차용해 지은 주류 기업입니다. 배상면주가는 경기도 포천에 전통술 박물관 산사원을 운영하고 있어요. 전통주의 역사와 함께 커다란 술도 400여 개가 줄지어 있는 광경을 만날 수 있죠. 전통주를 시음할 수도 있어서 수도권 외곽에 있음에도 인기가 매우 많은 박물관입니다.

ⓒ국순당

국순당은 백세주 30주년을 맞아 2022년 최고급 증류주 백세고를 선보였어요. 술에 대한 국순당의 50년 철학과 백세주 30년의 가치를 담은 술로, 탁주와 청주 위주로 라인업을 구성해 온 국순당의 증류주라는 점이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백세주 술지게미를 재발효한 뒤, 5년 동안 숙성해 부드러운 목넘김과 깊은 풍미를 맛볼 수 있어요. 전통주를 향한 국순당의 진실한 마음이 느껴지는 듯하네요.

옛 문헌 속에만 존재하던 전통주를 복원하고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해온 국순당 창립자 우곡 배상면 회장과 그 뜻을 이어가는 삼 남매의 남다른 전통주 사랑이 국내 전통주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전통주 시장은 코로나19를 거치며 2배 이상 성장했고, MZ세대에게도 큰 사랑을 받고 있어요. 전통주는 온라인 구매와 배송이 허용돼 이커머스 판매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데요. 프랑스의 와인, 아일랜드의 위스키, 동유럽의 보드카처럼 우리나라의 전통주도 전세계적인 사랑을 받는 술이 될 날, 멀지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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